

시오리는 여느 때처럼 등교를 위해 기숙사를 나섰다. 그러나 그 앞에 예상치 못한 존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 언니..? ”
시오리는 당황스러웠다. 후미가 집을 나가버린 그 날 이후로 자매는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었다. 본가에서도 마주칠 수 없었다. 길을 걸어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일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부터 갑작스럽게 자신의 기숙사 앞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시오리는 이런 어색한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후미가 어딘가 조금 불편해 보이고, 평소보다 왠지
피곤해 보인다는 것은 오랜 시간 봐온 자매로서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후미의 행동에 상처받았던 시오리일지라도, 눈에 띄게 힘들어 보이는 후미에게 쌀쌀맞게 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후미가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시오리는 조금 편했을까. 오히려 아무 말 없이, 슬퍼 보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후미가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시오리는 지금까지 후미의 이런 눈은 본 적 없었다.
“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건 시오리였다. 후미는 그제야 말을 할 생각이 생긴 건지, 입을 벙끗였지만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움이었지만, 역시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후미의 이런 모습은 본 적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자신의 언니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시오리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손을 뻗어 후미의 뺨 위로 조심스럽게 겹쳐보았다. 어딘가 아프다던가, 열이 나는 것 같진 않았다. 시오리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냐고 캐묻고 싶었다. 그리고 물어보기 직전에, 후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시오리, 보고 싶었어. ”
그 순간, 후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울려던 게 아니었는데. 후미는 당장 앞에 있는
시오리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며, 입고 있는 외투의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왜 이러지. 이상하네. 후미는 눈물을 닦으며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더는 나올 눈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후미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했던 모양이다. 끝없이 흐르는 것들을 닦아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후미는 뿌옇게 변해버린 시야 너머로 일렁이듯 보이는 시오리를 조금이라도 더 섬세하고 선명하게 보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앞에 놓인 거라고는 당황스러워 보이는 시오리의 표정뿐이었다.
" 내일.., 내일 다시 올게. 미안. "
후미는 자신이 할 말만 마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런 모습을 더 보여주기엔 문득 겁이 났기 때문일까. 후미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오리의 시선이 두려워졌다. 약한 모습은, 더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는 후미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당장의 상태가 걱정된 시오리가 후미의 손을 붙잡으려던 순간, 후미는 그대로 뒤로 돌아 뛰어갔다. 시오리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던 건지, 앞서 뛰어가는 후미를 쫓아갔다. 예전 같았다면 쫓아가기는커녕, 마음껏 뛰지도 못했을 텐데. 지금 같은 상황조차 시오리는 꿈만 같았다. 후미가 예전보다 느리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시오리에게 잡히기 직전이었던 후미가 골목을 향해 방향을 트는 순간, 시오리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분명 눈앞에 있던 후미가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시오리는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철제 쓰레기통도 열어보고, 그 위로 올라가 담장도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숨을만한 곳은 없었다. 정말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은 이상. 그러나 숨은 게 아니라, 사라졌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결국 시오리는 후미 찾기를 포기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하지만 수업을 듣고, 연습을 하는 내내 찝찝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시오리는 오후 연습을 마치고, 주말 동안 새로 들어왔다는 홍찻잎을 사러 시내에 다녀왔다. 기숙사 통금 시간이 아슬아슬할 때에야 기숙사로 되돌아온 시오리는 쥐죽은 듯 조용한 내부에 자연스럽게 발소리를 죽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오리는 홍찻잎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교복부터 벗어서 정갈하게 정리해두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시오리는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폈다. 매일 있던 일을 쓰던 다이어리였다. 오늘은 써야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찾아온 후미나, 새로 나온 홍찻잎이나. 시오리는
문득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한 후미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연락이라도 온 게 있나 싶어 휴대폰을 확인해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정말로 내일 올까. 시오리는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관계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슬슬 자야 할 시간인 것을 확인한 시오리는 방불을 껐다. 그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을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시오리는 벽을 짚고 서서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애써 가다듬어보려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호흡은 가빠지고 통증은 악화했다. 어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는 탓에, 제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탓에, 누군가를 부를 수도 없었다. 시오리는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있었다. 흔히 주마등이라 말하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시오리는 후미와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
점점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시오리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창문 밖의 홀로 떠 있는 밝은 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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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리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찝찝한 악몽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는 감각이 너무 생생했지만, 분명 꿈이었다. 시오리는 살아있음이 분명한 감각을 느끼기 위해, 연신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안심과 동시에 또다시 몰려오는 잠기운 탓에, 눈을 깜빡이던 속도가 점점 느려지던
시오리는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에 그제야 화들짝 잠에서 깼다.
“ 시오리! 더 자면 지각이에요! ”
시오리가 도통 늦게 나오는 날에만 들려오는 메이팡의 목소리였다. 평일의 시작부터 늦잠은 안 된다.
시오리는 침대 위에서 꼬물거리던 것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등교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기숙사를 나선 순간, 건물 앞에서 서성이던 후미를 발견했다. 후미 역시 시오리를 발견했다.
후미는 숨을 깊게 내쉬고, 시오리에게 성큼 다가갔다.
“ 보고 싶었어. 시오리. ”
무언가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웃고 있는 후미의 표정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지만, 어딘가 슬퍼 보였다. 분명 꿈에서 봤던 상황과 똑같았다. 이대로 후미가 운다면, 더더욱. 시오리는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들었다.
“ 오늘은.. 나한테 시간을 써줄 수 없을까? 학교에는 내가 연락할 테니까... ”
시크펠트로 전화를 하겠다는 후미의 말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시오리는 믿을 수 없었다. 밤새 꾼 꿈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현실 같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후미로부터 전해져오는 온기는,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후미와 함께
어울리는 일이 관계의 진전을 위한 한걸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시오리는 즉각 거절하기에 왠지 불편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는 틈을 타, 후미는 시오리의 다른 손도 붙잡았다.
“ 부탁이야. ”
결국 시오리는 거절할 수 없었다.
시오리는 종일 후미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후미가 정말로 시크펠트에 전화를 했는지는
시오리에게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함께 놀았던 놀이터에 가보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어린아이들이 없는 놀이터는 한적했다. 시오리는 그네에 앉아, 가볍게 발을 굴러보았다. 놀이터 앞에 있던 작은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어렸을 때나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던 장난감을 구경했다. 꽤 진지한 투로 사주겠다고 하는 후미를 말리느라 시오리는 진땀을 뺐다. 어렸을 때는 자주 먹지 못했던
솜사탕과 아이스크림도 각각 다른 맛을 사서 나눠 먹었다. 같이 사진도 찍었다. 액정 속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후미의 표정을 바라보던 시오리는 짙은 그리움을 느꼈다. 후미는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지만, 언제나 시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관에서는 어렸을 때 함께 보았던 영화가 재상영을 하고 있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영화관으로 들어간 후미와 시오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현실이, 더는 꿈만 같지 않았다.
해는 점점 넘어가고 있었다. 시오리는 시간을 확인했다. 곧 기숙사의 통금 시간이고, 그 전에 헤어져야 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왠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 시오리의 눈에 들어온 건 작은 관람차였다. 관람차 역시 어렸을 때 함께 탔던 것이었다. 하지만 언니가 기억하고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시오리는 슬쩍 후미의 눈치를 보았다. 시오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후미가 그 시선을 놓칠 리 없었다.
“ 관람차, 타고 싶은거지? ”
시오리의 손을 이끌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후미의 뒷모습은 왠지 예전보다 높아 보였다. 넓어 보였고. 그러면서도 조금 수그러든 것 같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끌어주는
이 손의 온기를, 시오리는 좋아했다.
“ 낮네.. ”
어려서 탔을 땐, 관람차가 너무 높다고 느꼈다. 무섭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낮게만 느껴졌다. 시오리는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도시는
노을을 입어 더욱 반짝거렸다.
시오리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말이 없던 후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후미는 시오리가 그랬던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돌아보지 않았다. 시오리는 굳이 후미를 부르지 않았다. 이렇게 눈이 반짝이는 후미는 오랜만인 것 같아서, 그저 보고 싶었다.
“ ...이게 시오리의 기억.. ”
작게 중얼거리던 후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눈물은 뚝 떨어졌다. 시오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는 모습은, 몇 번째더라.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불분명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일로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 언니. ”
시오리의 부름에 그제야 후미는 시오리를 바라보았다. 눈매 끝에 맺혀있는 눈물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 응? ”
“ 괜찮은 거지? ”
하지만 깊숙한 곳까지 캐물을 자신이 없었던 시오리는 더는 캐물을 수 없었다. 캐물었다가, 또다시 멀어진다면. 시오리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시오리는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 응, 역시 예쁘다고 .”
후미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누구보다 활짝 웃었다. 어느 때보다 맑게 웃는 얼굴 위로, 문득 어렸을 적의 후미 얼굴이 비쳐 보였던 건 기분 탓이었을까. 시오리는 이 복잡한 마음을 후미에게 터놓을 수 없었다.
마치 과거의 후미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에 얽매여있는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려는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또다시 가슴이 욱신거렸다. 마치 간밤에 꾸었던 꿈처럼. 시오리의 상체가 급격히 중심을 잃고 관람차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오리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살려달라는 듯이 후미의 발목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도와주지 않는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정말 괜찮은 건지. 묻고 싶은 게 아직 한가득이였는데. 시오리는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느꼈다.
후미는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죽어가는 시오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무심한 표정 위로 억지로 눌러내던 슬픔은 한치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시선이었다.
시오리는 마지막 힘을 짜내, 고개를 돌려 후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눈물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시야는 너무나 흐렸다. 끝내 시오리는 후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또 보러올게.”
시오리는 분명히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 또다시 어제의 일들이 꿈처럼만 느껴진다.
' 아마도 난 죽은 거겠지. 이건 일시적인 오류일 테고. '
꿈이라고 생각했던 몇 번의 죽음을 반복하던 시오리는 문득 언젠간 자신이 서명한 기억보존동의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혼자 죽을 때도 있었고, 누군가 바라보는 아래서 죽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구해주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하지만 시오리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구해지지 못할 운명일 것이다. 자신이 서명했던 계약서 내용에 죽은 자가 겪는 어떠한 현상에 대한 내용은 없었으니까, 분명 오류일 것이다.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과정이 어떻든 분명 폐기될 것이다. 기계란 그런 거니까. 게다가 살아있던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기계는 더더욱 엄중히 다뤄지니 말이다. 폐기라는 결론이 나온 순간, 시오리는 가장 먼저 후미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자신을 가둬놓은 사람 중 한 명이겠지만, 그럼에도 시오리는 자신을 찾아주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가 비록 죽음을 방임하더라도.
“ 시오리! 더 자면 지각이에요! ”
아침에 들려오는 메이팡의 목소리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매번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몸이 익숙해진 탓에, 다시 잠에 드는 횟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숙사를 나오는 순간 눈이 마주치는 후미도 더는 놀랍지 않았다.
“ 보고 싶었어. ”
시오리는 후미의 말에서 언제나 괴리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후미의 말 한마디로, 시오리에게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애매한 거리감이 사라지는 듯했다. 후미는 몇 번째의 시오리에게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고 있을까. 그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날이 갈수록 후미는 우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물론 시오리는 그런 사소한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후미에게 주름이 늘었고, 어느 순간부터 다크서클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오직 그러한 사실만이 시오리에게 반복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후미는 예전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오리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봐주는 그 시선만큼은 여전히 다정했고, 함께하는 순간은 매번 행복했으니까. 후미는 변하지 않는 반짝임을 가지고 있었다. 시오리는 알고 있었다.
후미가 찾아올 때면 시오리는 매번 학교를 빠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학교를 빠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는 편이 후미가 훨씬 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거절당할 불안함과 간절함으로 고통받는 건 괴롭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똑같은 루트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은 종일
카페에 앉아 이야기만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후미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가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인 건지, 평범한 학생이라면 알 수 없는 듯한 이야기를 했지만, 캐물을 수 없었다. 시크펠트 중등부 학생인 시오리의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한 척하는 게 최선이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안 됐다. 그 순간 꿈에서 깨게 될 테니. 가끔 후미는 시오리에게 이야기를 바라기도 했다. 시오리는 확실히 후미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싫어하던 학교 얘기를 부탁할 지경이었으니까. 후미는 시오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있었던가. 시오리는 후미의 표정이 생각나지 않았다.
후미는 어느 순간부터 시오리를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시오리는 이러다가 후미가 에델이나 다른 학생들과 마주치면 어쩌지 싶었지만, 몇 번의 죽음을 반복하면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오리 역시 마음을 놓았다. 마주친다면, 그건 그때 생각할 일이었다.
" 조심해서 들어가. "
" 바로 앞인데, 뭘. "
후미는 기숙사 앞에서 작은 두 손을 꼬물거리며 문을 여는 시오리의 모습을 마냥 웃으며 바라보았다.
후미의 시선을 알아챈 시오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뭘 그렇게 웃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혹시 누가 들을까 그렇게 하진 못했다. 대신 혀를 빼꼼 내밀어 장난스럽게 메롱을 하고 후다닥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는 게 시오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시오리는 시계를 보았다. 곧 있으면 또 오늘이 끝날 시간이었다. 가만히 앉아있던 시오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챙겨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걸음 소리를 죽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성큼성큼 기숙사 밖을 향했다. 통금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거, 똑같은 하루가 올 거, 어쩌면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시오리는 하염없이 걸음을 옮겼다. 뺨이 시리도록 차갑고, 두 손에 감각이 사라졌을 때쯤 시오리는 이상함을 느껴,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아까 봤던 가게가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 착각한 건가? '
시오리는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변 가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이상함은 증폭됐다. 거대한 괴리감의 정체를 한발 앞서 깨달은 시오리의 시선이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못할 때쯤, 시오리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또다시 그 가게가 시오리 앞에 놓여있었다.
시오리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두 눈가는 경직됐고, 손가락 끝에서는 땀이 맺혔다.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왔던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밤이라지만, 가로등은 켜져 있었다. 그런데도 유난히 어둡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다시 몸을 틀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쭉 난 길이 분명했지만,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둠 그 자체였다.
' 여기 옆에 뭐가 있었더라. '
시오리는 엉망이 된 사고회로를 억지로 돌려가며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둡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시오리가 알지 못하니,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이게 시오리의 기억.. ]
그 순간 후미의 말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기억. 살아있던 시오리가 경험한 기억들.
' 이게 만약 정말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만 구상됐다면? '
시오리는 바닥에 붙어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던 걸음을 힘겹게 떼어냈다.
' 내가 기억하는 감각만 구상되어 있다면? '
무거웠던 처음의 한두 발자국은 점점 빨라지더니, 점차 시오리를 뛰게 만들었다.
' 내 경험들뿐이라면? '
기억에 갇혔다. 이게 시오리의 결론이었다. 도출된 결론에, 시오리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인 세상을, 시오리는 믿고 싶지 않았다. 진실을 깨달은 대가는 끝없는 절망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빛나고 있지 않던 건 누구였던가. 이런 곳에서는 빛날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놓쳤던 손을, 다시 잡을 수 없다.
시오리는 후미를 찾고 싶었다. 후미를 찾아서, 이제 놓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아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기다려야만 하는 존재가 가지는 것은 두려울 뿐이다. 시오리는 두 번 다시 기다리는 것만을 전부로
세상을 살고 싶지 않았다. 기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오리는 이미 확정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하루의 끝에서 시오리는 죽음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죽음은 이제 시오리에게 두려움이 될 수 없었다.
도망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정해진 결말에서 시오리는 도망칠 수 없었다. 죽음의 고통은 어느 정도 익숙해질 수 있었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건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었다.
“ 시오리! 더 자면 지각이에요! ”
이번에도 들려오는 메이팡의 목소리에 그제야 시오리는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을 깨닫는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보았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유메오지 후미. 자신의 언니. 시오리 자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반복되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이 상황을 초래했을 사람.
시오리는 오늘 기숙사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즉, 후미를 만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문 앞에
후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오리는 지금 상황에서 후미를 만난다면,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변화를 줄 수 있는 건 후미뿐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은 것도 후미였다.
시오리에게 후미는 더는 구원자로만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시오리는 후미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변하지 않은 자신을 찾아주는 건 후미뿐이었으니까.
시오리는 어딘가에 연락조차 하지 않고 무단으로 학교를 결석했다. 어차피 누가 자신을 보러오던 그 누구도 자신을 구해줄 수 없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일 없던 오늘이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오리는 종일 자신의 침대에 파묻혀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그리고 죽을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쯤 당연하다시피 잠에서 깨어났다. 평화로운 죽음은 없었다.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에 들어 죽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지만, 살아있을 때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평생 경험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궁금해하는 것이 생긴다면,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호기심으로 남을 뿐이었다.
도저히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불러오는 것을 포기한 시오리는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폈다. 매일
같은 날짜에, 매번 다른 내용을 썼다. 하지만 또다시 오늘이 오면 그 내용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시오리는 매일같이 펜을 들어 오늘의 다이어리에 일기를 썼다.
' 나는 누구를 위해서 지금... '
문장의 끝을 적을 수 없었다.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살아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어있는 것인가. 시오리는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하는 동안 생각해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나아가지 못하는 삶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을까.
시오리는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앞으로 쭉 뻗은 손바닥의 끝을 잡아 가볍게 뒤로 당겨보았다. 근육이 팽팽하게 땅겨지는 감각들이 생생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시오리는 또다시 죽음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머릿속이 쨍하고 갈라지듯 아파왔고, 심장은 오래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점점 뜨거워지는 몸을 이끌어 애써 침대 위에 뉘었다. 무거운 눈꺼풀만이 천천히 깜빡거리는 것을 반복하며, 조용한 방안에서 이번에도 죽어갔다.
시오리는 어떻게 이런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시오리는 처음 후미를 보았던 날을 생각했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마냥 울기만 하던 그 슬픔의 이유를 이제서야 깨달은 것 같았다.
처음부터 후미는 더는 반짝이지 못할 시오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반짝이는 시오리의 모습을 본 순간, 후미는 시오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더는 그런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 시오리! 더 자면 지각이에요! ”
시오리는 메이팡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곧바로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미적거리다 후미를 보지 못하는 일 같은 건 곤란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드디어 후미를 죽이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기숙사에서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다. 손에는 땀이 멈추질 않았다. 곧 이 손으로 끝을 보게 될 거라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심장은 당장 죽음에 이르러도 이상하지 않을 듯 했다.
시오리는 숨을 한번 깊게 내쉬었다. 서로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끝을 내야 하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시오리는 문을 열었다.
후미가 서 있었다. 점차 가까워졌고, 두 손으로 목을 쥐었다. 그리고 후미가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힘을 주었다. 바라볼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분명 약해질 걸 알았다. 그렇기에 시오리는, 후미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 제발.. 날 놓아줘. ”
시오리의 마지막 인사였다. 후미는 막혀오는 숨 탓에 캑캑거리면서도, 살려달라는 의사를 내비치진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끝까지 시오리만을 바라보았다. 시오리는 울고 있었다. 자신의 목을 감싼 이 작은 두 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후미는 아무런 말 없이 시오리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웃음이 번져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을 뜬 후미는 자신의 몸 곳곳에 붙어있던 패치들을 떼어냈다.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후미는 얼얼한 목을 매만지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이번이 몇 번째였죠? "
그런 후미에게 말을 걸어오는 건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온기는 가지지 못한
인간형 안드로이드였다. 후미의 생활 전반을 보조하며, 연구를 돕고 있었다.
" ... 글쎄. 그래도 열 번은 넘지 않았나?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
후미는 이번이 몇 번째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점점 힘들어지는 몸이 시간의 흐름만을 가늠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가면 갈수록 시기가 짧아지고 있어요. "
" 죽이려고 했던 건 처음이었어. "
" 심각하네요. "
안드로이드의 말에 후미는 작게 웃었다. 고작 기억데이터에 심각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같은 데이터라 그런 걸까. 후미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수는 오히려 기쁜 일이었다.
" 하지만 처음이었잖아?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짓을 더 했을지 몰라. 주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갔으니 까.. "
알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적막 속에서 웃는 사람은 후미뿐이었다.
" 조금만 더 해보면, 죽은 사람의 기억으로 그 사람의 자아를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
후미는 액자 속 어렸을 때의 자신과 시오리가 찍혀있는 사진을 가만히 앉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닳아버리는 사진은 현실이었다. 언젠간 사진은 찢어져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후미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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