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을 희생한 이치에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후미
그 날의 너의 마음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름다웠다.
후미, 이번에 내 소원 하나 들어줄래?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휘휘 저었다. 환청이나 컴퓨터에서 나오는 전기 소리가 아닌듯한 생기가 듬뿍 들어있던 울림이었다. 후미는 그걸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제 향기를 듬뿍 뿌리며 손을 흔드는 이치에가 있었다. 감고 있는 목도리는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벚꽃이 늬여진 연분홍색 머리칼은 부드러움을 담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쉬이 살랑거렸다.
그 소리를 타고, 후미는 문득 제 심장이 여지없이 뛰어짐을 인식했다. 과거의 4월을 닮은 예쁜 향바람이다. 그럼에도 여기저기에서 그녀의 향기가 그득했기 때문에 애써 후미는 고개를 돌렸다.
이치에는 여느때나 이상한 사람이었다. 열기가 가득한 곳에도 딱 보기에 덥기 그지없는 목도리를 고집스레 칭칭 둘러매고 자신은 괜찮다며 장난을 치고 다정한 미소를 남김없이 퍼부어주는 사람이었고, 후미에게 난생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허울뿐이라고 생각했던 너울을 담아 건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언제부터인지는 자세히 몰라도 그녀를 보면 무언가 간질간질하고 가슴 가운데 부분이 흔들려진다. 시기는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후미는 이치에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굳이 저 작은 부탁을 말할때에 일부러 그런 물기를 담지 않아도, 후미는 웬만해서는 짜증내면서도 이치에의 말을 다 들어주었을 것이다.
온통 불빛 사이에 두드러지듯 선명히 빛나는 붉은빛이 눈에 따갑다. 후미는 의식하지 않으려 눈길을 돌리려 노력했다. 아직까지도 이치에의 작은 소음은 크게 다가왔다. 통제를 하지 못한 채 고장난 인공지능처럼 허울없이 흔들리는 제 모습에 그냥, 후미는 그러려니 넘기고야 말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문득 아무것도 없이 허전한 바람만을 남겼던 손에 부드러운 촉감이 들었다.
후미는 묵묵히 고개를 돌려 당연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후미를 그 맑은 눈동자에 들인 이치에는 거짓없이 헤헤 웃었다. 그럼에도, 거칠게 몰아치는 감정과는 반대로 후미는 과묵할 따름이다. 이미 이치에는 익숙한 지 서스럼없이 후미의 손을 소중히 보듬으며 뭐라고 말을 했다. 흐드러진 벚꽃에 절로 날이 뜨거워지는 그런 봄이었다. 그녀는 익숙치 않게 발걸음을 꾸준히 놀리며 시야를 감아 빛을 차단시켰다.
아아, 그때 자신은 뭐라 답했어야 했나. 후미는 여전히 꽃빛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말하고야 만 그 언어를 다시 상기시켰다.
그래,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게. 이치에.
고민없는 대답에 미소를 머금다 옅게 일그러지는 표정이 되살아 난다. 그때 분명히, 너는 슬퍼하고 있었다. 마음을 가득 채우는 아픈 감정에 분명 너는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대답했던 말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그 말로 인해 네가 부식된 강철과도 같은 고통에 잠식되었단 사실이다.
후미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그때 잊겠다고 말했어야 옳았나. 끝끝내 답을 하지 못한 부탁을 덧없이 떠올려 본다.
그럼, 후미.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줘.
너를 닮은 꽃빛에 눈이 아프다.
BACK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