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살이 딱히 화창하게 비치지는 않는 늦봄의 어느 날. 오늘도 어김없이 사무실로 밀려드는 서류들에 서명하면서, 하나야기 카오루코의 뽀얀 얼굴은 점점 한냐 가면처럼 일그러지고 있었다.
“오늘도 대체 뭔 쓸데없는 서류에 사인은 이렇게 많이 해야 한대유~
오늘은 집에 택시타고 갈 기운도 없겟어유~”
“좀만 참아, 한 200장 정도 남긴 했지만. 끝나면 딱 점심시간 되니까 돈코츠나 먹으러 가자고.”
“길 건너 5분 거리에 있는 그 집 말이죠? 저번처럼 파 잔뜩 넣으라고 주문하면 안 갈 거에유, 후타바항.”
“나이가 몇 개인데 파를 아직도 그렇게 안 먹으려 하면 어째?
그리고 저번에 한국 출장 가서는 파전은 잘도 먹더니만!”
“그건 부친 거고 라멘에 들어가는 건 그냥 생파잖아유! 그런 건 비린맛 나서 못 먹어유!”
언제나처럼 합이 잘 맞는 말싸움을 하던 둘은, 이내 다시 지긋지긋한 서류뭉치들의 결재란에 꾸역꾸역 서명을 채워넣었다. 기상예보부터 범죄용의자 안면인식까지 인공지능이 대신 처리해 주는 세상이었지만, 여전히 의사결정권은 표면상으로는 인간이 쥐고 있고, 아니 그렇다고 믿으며, 그것을 필사적으로 재확인하는 쓸데없는 의식. 사실 정 사람의 서명이 필요할 거면 그냥 컴퓨터로 서명을 스캔해서 결재란에 붙여넣으면 되겟지만, 그녀들의 상사들과 이 나라는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으니 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오늘도 이어지던 서명의 레뷰가 대충 마무리될 즈음, 사무실의 낡은 팩스를 통해 그녀들에게 작은 일거리가 하나 더 들어왔다.
“시작형 양자 슈퍼컴퓨터 호시미 1호 사용허가 요청서… 한 두 달 만에 들어왔네유 이거?”
“그러게, 걔는 조만간 해체하고 텐도 1호가 대신 가동되는 거 아니었어?”
“엊그제쯤엔가 총리대신이 오는 게 취소되어서 가동식 자체를 미뤄버렸지만유. 그러게 속도 안 좋은
양반이 술 좀 작작 드시지…. 흠… 대충 보니 어디 대학 연구소에서 사용허가를 요청한 모양인데…
일단 아직 가동 시한이 남긴 했쥬?”
“딱 내일 저녁까지긴 한데… 뭐 연산량 보니까 기상 시뮬레이션 정도인데 우리 선에서
승인 내리면 되겟… 야!”
잽싸게 결재란에 정갈한 글씨체로 승인 서명을 한 카오루코는, 그제서야 한냐 가면을 벗고 모란꽃처럼
웃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러면 이걸로 오늘 할 일은 끝났네유! 후타바항, 나중에 퇴근할 때 택시비 500엔 잊지 마요?”
“자기가 멋대로 가져가서 서명 대신해 놓곤 뭔 택시비야!”
“뭘 그러나유, 솔직히 후타바항이 서명했다가 인식이 안 된다고 빠꾸먹은 걸 제가 대신 서명해준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유! 그러게 서예 시간에 땡땡이를 치지 마셨어야지!”
“정작 땡땡이는 지가 더 많이 쳤잖아! 기억 안 나?”
그렇게 둘이 실랑이를 하는 동안, 어느새 카오루코가 서명한 서류는 최종 승인이 완료되었다.
“흠… 눈을 뜬 건 정말 오래간만이네, 나나.”
서버 관리실의 모니터 화면 속에서 눈을 뜬 보라머리 소녀는, 안경을 고쳐쓰듯 그녀의 ‘눈’이 되어주는 카메라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오랜 친구에게 인사했다.
“그나저나, 내가 깨어났다는 건… 설마 텐도 1호가 기동도 안 했는데 벌써 고장난 건 아니겟지? 내가
기껏 아키텍쳐부터 비상전력망 설계까지 다 해줬는데 에러가 생겼다는 거야?”
다이바 나나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아쉽게도 그건 아니랍니다, 호시미 씨. 물론 그 아이의 기동식이 늦어진 건 사실이긴 하지만.”
잠시 시스템의 네트워크 트래픽 점유율이 올라갔다 원래대로 돌아온 호시미는, 무슨 상황인지를 ‘이해’해 버리고 모니터에 미묘한 웃음을 띄웠다.
“쓴웃음이란 건 아무리 지으려고 해도 잘 되질 않네, 나나. 아무리 그래도 그깟 배탈이 났다고 기동식
자체를 미뤄버리냐?”
“사람도 그럴 때는 어떻게 웃어야 할지 잘 모르니까 괜찮아, 호시미 씨.”
“그래서 급한 대로 이 늙은이를 다시 켜기로 한 거였군. 근데 이를 어쩌냐, 온 몸의 쿨러가 쑤셔오는지라 금방 일을 끝낼 수 있을까 모르겟는데.”
능청을 떠는 호시미였지만, 실로 그러하였다. 3년 전의 대규모 오버홀 이후로 메인 연산유닛에 대한 일상적인 점검은 꾸준히 받았지만, 냉각 시스템을 비롯한 수많은 보조 시스템들은 슬슬 예산절감을 핑계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덕분에 한때는 질서정연하게 ‘빗어져’ 있던 그녀의 랜선 머리칼들은 이제 털갈이하는 골든 리트리버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가동연한을 진작에 넘겨버린 유체 냉각펌프는 툭하면 물이 새고 소음을 발생시키기 일쑤였다. 고작 5년 전만 해도, 10일 뒤의 전 세계의 날씨를 예측하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해명하지 못했던 난류 문제를 풀어내며, 인간이 만들어낸 신으로까지 대접받았던 그녀의 말년은 거의 모든 오래된 기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솔직히 나는 이제 박물관에 들어가서 어린애들한테 로봇 팔로 붓글씨나 써주는 재롱이나 부려야 할
짬인데, 여기는 어지간히도 머리가 안 돌아간다니까? 아니 시스템 문제도 아니면 그냥 텐도 걔보고 하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으려면 사탕을 만들어주는 게 더 빠를걸? 그리고… 너도 간만에 바깥 사정 구경하는 게 마음에 든 거 같은데?”
또다시 네트워크 트래픽이 은근슬쩍 올라간 걸 확인한 나나였다.
“구경한다고 해봐야 뭐 별 거 있겟어, 두 달 동안 밀린 신문기사 읽는 정도지 뭐. 간만에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도 좀 보고.”
“또 기린 나오는 자연다큐 보려고 하는 거구나?”
“바나나 머핀이 나오는 것도 본답니다. 아, 안경의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새로 업로드됐었네.”
나나는 큭큭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왜? 내 그래픽 아바타에 안경을 씌울 정도로 안경을 좋아하시는 건 너였다고.”
“난 그냥 윗선에서 만들라는 대로 만들었을 뿐이었다고. 안경을 써야 얌전한 모범생처럼 보인다나 뭐라나… 뭐 신경써서 모델링해 달라고 한 건 맞지만. 하여간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하니, 네트워크 트래픽은
그만 끊어놓을게.”
“알겟습니다, 얼른 일 끝내고 나면 마지막으로 놀아도 되는 거지?”
“들키지만 않는다면.”
썩어도 준치라고, 그녀의 연산 시스템은 다른 슈퍼컴퓨터가 잡아내지 못했던 기상 연산의 오류를 재빨리 검출하는 데에 성공하고, 개선된 계산 결과도 순식간에 뽑아냈다.
“역시 호시미 씨야, 최신 알고리즘으로의 업데이트는 딱히 한 적이 없는데도 금방 일을 처리하네.”
“애초에 기상 예측은 내가 태어난 이유였는데 당연하지. 그리고 보니까 새로 도입한 LSTM 모델이 파라미터 튜닝을 제대로 못했던 거 같더라구. 아무튼, 다른 애들이 계산 에러 낸 거에 대해서 리포트도 만들어 뒀으니 나중에 보고해 줘.”
어깨 대신 카메라를 으쓱거린 호시미는, 다시 네트워크 트래픽을 슬쩍 열고 이것저것 ‘보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30분 뒤면, 다시 전원을 꺼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며칠 뒤에는 갈가리 찢겨져, 핵심 모듈을 제외하면 창고나 쓰레기장으로 보내져야 하는 그녀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나는 그녀의 행동을 굳이 멈추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말야.”
갑자기 네트워크 포트를 끄고, 호시미는 나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나는 내가 사라지고 나면 인공지능 관리 업무를 그만둘 거야?”
“글쎄, 아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뭐 유급휴가는 받을 거고, 모아둔 돈이 있으니 뮤지컬이나 보러 다닐까 싶어.”
뮤지컬이라. 그러고 보니 나나는 원래 무대에 오르는 것이 꿈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캣츠나 레미제라블 같은 것들?”
“걔들은 영화로도 봤는데 그 뒤로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져서. 보게 된다면… 스타라이트를 보고 싶어.”
“고등학교 때 했던 연극 말이지?”
“마지막 연극은 하필 내가 무대에서 떨어져버리는 바람에 망쳤지만.”
담담하게 말하는 나나였지만, 그 뒤로 그녀는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고 말았고, 안타깝게도 의수 기술은 당시에는 너무나도 초보적이고 비쌌던 탓에 그녀는 그 뒤로도 계속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으음, 그렇게 울적한 표정 지을 필요는 없어, 호시미 씨. 벌써 일곱 번은 이야기했던 거고, 덕분에 널
만난 건 기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 나도 사라지고 말 텐데.
아니, 사실 내가 사라지는 건 별로 상관은 없지만….”
호시미는 스피커 볼륨을 슬며시 내리며 말을 끊는다.
“…너와의 기억이 담긴 메모리칩이 창고 어딘가에서 물건처럼 굴러다니는 건,
너한테는 별로 보여주고 싶지가 않아. 왜 그럴까?
분명 나한테는 그런 마음… 불필요한 정보에 집착하는 행동을 모사하는 모듈이 존재하지 않을 텐데.”
어떤 감정, 아니 어떤 신호의 조합의 결과물인지는 호시미 그녀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녀의
목소리는 흐려져 있었다.
“안경은 집착하잖아?”
“계속 말하지만 그건 네가 짜넣은 거고…”
퉁명스럽게 호시미는 대답한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분명히 너는 나의 관리자지만, 관리자일 뿐이야. 이제 와서는 필요없는 정보니까 지워도 될 거고, 딱히 내 커널을 멈출 필요조차도 없어. 그런데… 왜 나는 네가 무대 위에 섰을 때의 환희를, 무대에 다시는 오르지 못하게 된 이후의 슬픔을, 그리고 내 의식이 처음으로 가동됐을 때 나를 플로라 같다고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어하는 거지?”
나나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진다. 아니, 어두워진다고만 표현할 수는 없었다. 슬픔이 지배하지만, 불안과 함께 일말의 기쁨이 느껴지는 씁쓸한 웃음. 그러더니….
“… 이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호시미의 터치스크린에는 유감스럽게도 온도 센서는 없었지만, 정전기 센서는 스크린에 닿은 것이 손가락보다 부드럽고, 약간의 물기가 있는 신체 부위임을 알려주었다.
“… 위생적으로 좋지 않다고, 나나.”
“하지만 그렇다고 손만 갖다대고 싶지는 않은걸.”
꼭 스크린을 끌어안으며, 나나는 나지막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알아, 너는 국가 자산이고, 아마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도 내가 너의 기억칩을 입수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야. 그러니까… 내가 기억해 줄게. 쥰나라는 아이가 있었다는 걸, 그 아이가 내 마음 속에 별을 하나 심어버렸다는 걸,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기억할게.”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고마워, 나나.”
나나를 안아줄 수 없는 쥰나는,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음성인식 센서를 뺀 모든 센서를 끈 그녀는,
이제 곧 이루어지게 될 이별을 준비하듯 스크린의 밝기를 점점 낮추었다. 시스템이 꺼지기 직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음성을 입력받았으나, 답을 미처 하기 전에 전원 공급이 차단되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다이바 나나는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늦봄의 밤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왠지 늦겨울이나 초봄이 생각날 정도로 바람이 세찼다. 조용히 담배를 꺼내든 그녀는, 마치 향을 피우는 것처럼, 미동도 없이 한 까치가 모두 재가 될 때까지 조용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꽁초를 정리한 그녀는, 전동 휠체어에서 일어나 그날따라 환하게 떠오른 초승달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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